서울촌놈 제주살이/아이 좋아 제주 여행

4.3평화여행 위한 답사준비

4.3평화여행 서쪽코스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한 사건"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


무등이왓 

4.3때만 하더라도 130가구가 모여살던 곳 

아이가 춤추는 모습과 닮은 지영이라고 해서 무동동(舞童洞)이라 했다고. 

1862년 임술민란(강제검의 난), 1898년 방성칠의 난을 겪은 곳. 

300여년 전 설촌된 마을로 주로 화전일구며 살아와. 


4.3 1년 전인 1947년 여름 공출문제에서 시작. 미군정은 수확량 기준으로 식량을 털어가던 일제때보다 더하게 경작면적을 기준으로 획일적 수납조치. 

(이른바 성출반대사건) 1947년 8월 8일 보리수매 독려차 들른 군청 직원 4~5명 주민의견 무시하고 오만하게 굴다 청년들에게 집단구타-> 연행. 강경탄압은 오히려 입산자만 낳아 이후 동광리는 미군정이 주목하는 마을이 돼 수시로 경찰이  들락달락. 


1948년 11월 15일 섬에 소개령이 내려졌으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황서 지역 마을유지 10명 이유없이 학살. 여러차례 토벌대 마을로 올라오고 그때마다 이리 저리 피해다니기 일쑤, 해안마을로 내려간다 해도 산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 '이미 도피자 가족' 낙인.


1948년 12월 12일 잠복한 토벌대가 시신 수습 위해 마을 돌아온 사람을 붙잡아 산채로 화장. 그 뒤로 시신 수습자 없었고, 그 시신을 굶주린 돼지가 뜯어먹고, 그 돼지를 토벌대가 먹고... 


4.3 전 과정서 무등이왓 희생자 최소 100명 이상. 


제주4.3사건실무위원회, 2001년 3월 29~4월 3일까지 무등이왓 등 6군데 1차로 표석 설치 

"여기는 4.3사건의 와중인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남제주군 안덕면 무등이왓 터이다. (중략) 4.3으로 무등이왓에서 약 100명, 삼밭구석에서 약 50명, 조수궤에서 6명이 희생됐다" (가해주체 진압군)


헛묘 

4.3 희생자 중 온전히 시신을 수습한 경우가 적기 때문에 유족들은 망자가 생전에 입은 옷가지 등을 묻은 헛묘를 만들어. 


희생자 많이 낸 무등이왓 임씨 일가도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1년 뒤 칠성판을 만들어 들고 정방폭포 위를 찾아가. 하지만 조그만 구덩이에 뼈들만 엉켜있어 구분이 불가. 


돌아온 그들은 심방 불러 굿을 하고 희생자 입은 옷가지로 원혼을 불러 마을 근처에 무덤 만들어 놓아-> 동광 육거리 헛묘 


9명의 헛묘(2기는 합묘) 조성한 유족 임문숙 "혼이라도 불러와야 했어. 마을 잃고 사람 잃었지만, 그들이 쉴 곳을 만드는 것은 산 사람들의 몫. 섭섭해 만들었지만 허망한 일"


큰넓궤

궤: 작은 자연동굴을 의미하는 제주말.


동광목장 안에 있는 용암동굴. 1948년 11월 중순 이후 토벌대 초토화작전 시행되며 은신처를 찾아 헤메이다 12월 경 큰넓궤로 숨어들어. 당시 주민들은 주로 도너리오름 곶자왈에서 숨어지내. 그러다 주민들은 큰넓궤를 발견하고 폭설이 쏟아지자 이 굴로 들어가. 당시 어른아이들이나 노인은 이 굴속에서 살아. 청년들은 주변 야산이나 근처 작은 굴에 숨어 토벌대의 습격에 대비해 망을 보거나 물과 식량을 나르는 일을 해. 

궤에 들어가는 입구는 상당히 좁음. 한사람 겨우 들어갈 길을 10미터 들어가면 2~3미터 높이의 절벽. 절벽을 내려가면 작은 광장이 있고 앞쪽으로 동굴이 수십미터 이어짐. 

이곳에서 60여 일 피난. 120여명 숨어있었으나 보초 서던 사람이 잡히며 들통. 


토벌대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어 입구를 돌로 봉쇄하고 철수했으나 도너리 오름서 망보던 이들이 치우고 피신. 한라산 쪽으로 피신했으나 내리는 눈때문에 발자국이 남아 발각. 


1949년 1월 결국 대부분 체포. 한림 토벌대에게 잡혀간 일부는 까마귀빌레에서, 대정 토벌대에 잡혀간 일부는 모슬봉 동쪽 편에서, 안덕 토벌대에게 체포된 일부는 정방폭포서 사망. 


정방폭포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28미터에 달하는 물줄기를 지닌 정방폭포는 서귀포 일대의 최대 학살터. 폭포 물줄기가 떨어지는 기암절벽과 부근 소남머리가 그 현장. 


제주도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11월 24일 이래 최소 6차례 이상 대학살 자행. 살인 경험 없는 사병들의 실습용으로 양민 이용하기도. 


1949년 1월 22일 무등이왓 사람들이 처형. 한꺼번에 86명 죽었는데 이중 20여 명이 무등이왓 사람들. 


가시리 밭에 가면 찾아가 볼 곳 = 가시리 새가름 마을터 

표선국민학교 수용된 이주민 17명이 속칭 버들못 근처에서 목숨 잃는등 25명 희생. 1949년 2월부터 가시리가 현재의 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재건되면서 2가호가 새가름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외로움에 못이겨 또다시 떠나가버려 끝내 옛 마을을 이루지 못했다. 


참고자료: 제주역사기행 (이영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유적2 (제주4.3연구소), 4.3유적지 길라잡이 (제주4.3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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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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