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복지

장애인식, 배려아닌 권리로 바라봐야

“나는 일생동안 아프리카인의 투쟁에 헌신해왔다. 나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고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이상을 간직해왔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목표로 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런 소망을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다.” 넬슨 만델라



장애인복지관 건립을 반대하는 아파트 주민회의 공고문

도봉구의 '명품 아파트'를 표방한다는 한 아파트 주민회에서 '지역에 장애인복지관 건립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공고문이 트위터 등을 통해 알려지자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입주자 대표 명의의 이 공고문에 따르면 ▲집값 하락 ▲차량통행 복잡 ▲장애인 출입으로 인한 사고위험 증가 ▲보통사람이 사는 이곳에 (장애인이)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게 이유다.

 

그들이 말한 '보통사람'은 도대체 누굴 지칭하는 걸까, 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84세대의 가족 중에도 뇌졸중 등으로 인해 장애를 입은 이가 한명도 없지 않을 테고, 가족이나 친척 중에 지적장애 등 정신적 장애가 있는 이들이 없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오히려 보통의 상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서울시 25개 구 중 장애인복지관조차 없는 구가 도봉구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창피해야 할 텐데 말이다. 굳이 인권이나 법률을 들먹이기 않더라도 이런 시선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자식들에게는 어떻게 가르칠지, 무서울 따름이다.

 

카르텔을 형성하기 좋은 '집값 하락'을 무기로 내세운 것도 치졸하다.

그동안 일부 장애인복지관이 지역주민과 교감을 나누고 사랑방 역할을 함으로써 지역사회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하기보다 다른데 치중했던 결과가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는 데 대해 사회복지계 내부의 반성도 필요한 대목이지만, 과연 장애인복지관이 들어섰다고 집값이 하락했다는 근거 없는 괴담의 출처는 어디인지 궁금하다.


강원도 양양에서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 빚어지고 있다.

서울시가 강원도 양양군 하조대 해수욕장에 '하조대 희망들'이라는 장애인 숙박시설을 건립하려고 하자 양양군과 일부 주민들의 반대로 건립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양양군청은 ‘하조대 희망들’이 장애인숙박시설이 아니라 사회복지시설이라고 주장해 건축협의를 취소했으나 1심 재판에서 패소했다. 허나 양양군청 측은 이에 불복, 항소하며 건립을 반대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이 지속돼 내년 2월까지 건립추진이 이뤄지지 않으면 국비 22억 원을 고스란히 반납해야 한다. 사실상 건립이 불가능하게 된다. 결국 장애계단체는 지난 13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양양 군수를 상대로 진정을 제기해 인권위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지역 상인들의 입장에서야 ‘돈 없는 장애인’들이 와봐야 지역경제에 도움이 안될 테니 손해일 수 있겠다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바꿔 장애인, 노인들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편안한 휴양지’라는 이미지를 홍보수단으로 삼았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외국의 유명 해수욕장에는 지체장애가 있는 이들도 손쉽게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해변용 휠체어 등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비치해놓는 등 장애인, 비장애인, 노인과 어린이 등 모두가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허나 이런 고민조차 없이 일부 상인들의 목소리가 전체인양 지자체가 나서서 대변하는 현재의 상황은 납득할 수가 없다. 이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뜨겁지만 양양군수는 요지부동이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앞장서야 할 자치단체장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셈이다. 이보다 더 큰 상처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지역공동체는 회복하기 어려운 길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장애인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 이제는 깨져야

 

연달아 터진 이 두 사건을 지켜보며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감출수가 없다. 장애인 시설 건립에 대한 반대 이면에는 고질적인 장애인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민들이 직접 나서 지역의 현안에 대해 목소리 높이고 적극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다. 허나 ‘집 값 하락’ 등 불확실한 자본논리를 근거로 내세워 막무가내로 자신들의 목소리만 관철하려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가 과연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의구심이 든다.

 

전 세계 몇 안 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시행하고 있는 국가에서 이런 장애인 차별 사건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잘못 빚어낸 ‘장애인 상(象)’에 대한 오해 때문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장애가 있는 사람의 상태를 일컫지만,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집단화해서 생각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무리’라는 희한한 꼬리표를 붙인다. 여기에, 나와 동급이 될 수도 있다는 듯, ‘극복’이라는 표현으로 미화하고, 때에 따라서는 동정심을 촉발한다. 이렇다보니 언론매체나 사회복지기관의 ‘장애인을 배려하자’는 구호가 ‘선긋기’로 잘못 받아들여져 시혜적인 인식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 돼버렸다.

 

물론 동정과 배려하는 마음이 항상 나쁜 뜻일 수는 없겠으나, ‘도와줄 수 있으면 그렇게 하겠지만, 내 상황이 안 좋으면 어쩔 수 없다’는 심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지역사회의 한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배려, 즉 형편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장애인 vs 일반인(비장애인)’의 이분적인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이 같은 시선은 장애인생활시설 등에 자원봉사를 다녀온 이들이 남긴 수기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불쌍한 사람’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불안한 마음’으로 출발해 ‘천사같이 맑고 순수한 영혼’을 거쳐 ‘오히려 내가 용기를 얻고 왔다’로 마무리 되곤 하지만, ‘왜 저들은 저런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가’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극히 적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지적하는 이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라. ‘불쌍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보니, 나는 그리 불쌍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들을 도울 수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뜻이 뭘 의미하겠는지를.

 

이렇다보니 ‘그들은’ 나와는 떨어져서 다른 공간에 사는 사람들로 의식하게 되고, 내 공간에 침범하는 것을 불쾌한 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닐까. 전국의 모든 해수욕장이 보행약자도 출입이 편하고 손쉽게 묶을 수 있도록 설계됐더라면, 장애인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주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이용할 수 있는 장애인복지관이었더라면…. 짚어봐야 할 숙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말은 법으로 정해놨기 때문에 지켜져야 하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살아가는 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할 원칙이다. 불쌍하면 떡 하나 주고, 내가 어려우면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이 원칙이 잘 지켜지도록 홍보하고, 독려하는 일은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몫이다.

 

이제는 배려가 아니라 권리다. 참다운 민주주의 국가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서울시복지재단 웹진 천만다행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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